한 줄도 쓰기 힘든 날
기획자로 일하다 보면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키보드를 타이핑하는 시간보다 깜빡이는 커서를 더 많이 보는 날.
머릿속에 무수한 생각과 정보가 섞이며 무거워지며, 단 하나의 생각으로 연결이 안 될 때.
오늘 내가 그런 날이었다.
나는 평소에도 가끔 그런 날이 있을 때에는 기사를 읽거나 업무와 관련된 다른 공부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은 기사나 다른 공부를 해도 막다른 길이 머지않아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획자로 일을 잘하고 있는 건가?", "기획을 더 잘할 수 있을까?"
순간 이 기획이라는 일이 두렵게 느껴졌다.
나는 복잡한 생각 정리를 주로 노트에 연필로 끄적이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문서(파워포인트, 피그마, 메모장)에 옳긴다.
키보드로 타이핑을 해서 문서로 만드는게 내 일이다.
생각한 것을 신나게 키보드를 통해 글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 과정이 즐겁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키보드로 단 한줄도 못쓰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갑갑하다고 해야할까?
학창 시절에 체력장을 막 마치고 갈증이 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느낌에 괜히 스스로 짜증만 났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빨리 내가 문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조급해졌다.
지금 다시 고민을 해봐도 잘 모르겠다. 아직도 그 갈증은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다.
원인을 잘 모르겠다.
이 또한 하나의 성장이라 막연하게 생각하고 지나가기에는 조금 더 내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고자 블로그 글을 쓰고 있다.
기획자의 산출물
기획자는 여러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바탕으로 문서를 만든다. 그리고 그 문서를 통해 설득하는 과정을 거친다.
때로는 설득이 안되기도 하고, 가끔은 스스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문서를 만들기도 한다.
문서의 형태와 구조는 일반적으로 정해진 틀이 있다. 회사마다, 부서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맥락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맥락에 따라 사용하는 툴은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을 툴보다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다.
문서로 상대방을 잘 설득하기 위해서는 기획자가 기본적으로 글을 잘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획하시는 많은 분들이 블로그 글을 쓰는 걸 추천한다. 그래서 나도 블로그에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유시민 작가의 <글쓰기 특강>에서도 처음 나오는 내용이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글을 많이 써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3 형식으로 문장을 단순하게 쓰는 게 좋다고 한다.
기획자 문서의 핵심은 글이다. 그리고 글을 돕기 위한 그림이다.
그림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화면의 이해를 돕기 위한 wireframe, 사용자/데이터 흐름 이해를 돕기 위한 flowchart, 설득을 위한 레퍼런스 image, 프로젝트 추진하는 근거의 datatable/graph.
글과 그림이 합쳐져 문서로 완성이 되면 일단 첫 단추를 잘 꿰맸다고 할 수 있다.
문서를 잘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시간(마감기한)이다.
기획자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꽤 타이트하다. 하지만 시간은 정해지기도 하지만 스스로 정해야 할 때가 많다.
아, 정해진 시간은 윗사람이 그 문서를 찾기 전까지다.
기획자 스스로 100% 만족하는 문서를 만들 수 없다.
만들어진 문서는 기획자의 손을 떠나 디자이너나 개발자를 통해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만들어지게 된다.
손을 떠나도 문서는 기획자의 손을 타야 한다. 업데이트가 되기도, 다시 삭제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기획의 과정이자 기획자의 산출물이라고 생각한다.
기획자가 가장 실망스러울 때는 언제일까
프로젝트 결과가 실망스러울 때보다, 프로젝트가 시작도 못했을 때이지 않을까?
나름 고민과 정성을 들여 만든 기획안이 짧은 회의 중에 엎어지는 경우는 허다하다.
안 엎어지더라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상처를 많이 받을 수 있다.
스스로 괜찮다 하지만 괜찮지 않다. 다들 그럴 것이다.
제법 괜찮은 생각으로 시작해서 그럴듯한 문서를 만들어 냈지만 사람 생각하는게 다 다르기 때문에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각자의 입장이 있기에, 상황은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에.
기획자의 문서도 계속 바뀌게 된다.
다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자는 중심을 잃지 않고 문서를 만들어야 한다.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꽤나 그럴 듯한 쓰레기가 되기 때문이다.
나도 꽤 많은 쓰레기를 만들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아마 만들 것 같다.
그래도 그럼 어때. 문서를 만드는 게 내 일인걸.
앞으로 재활용은 되는 문서를 만드는 걸 목표로 하면 되지.
최근 바쁜 와중에 무언가 진행되거나 보이지 않아 지쳤던 것 같다.
퇴근 전에 업무현황을 업데이트하면서 보니, 그래도 짧은 기간에 제법 일을 쳐냈던 것 같다.
잘 쳐냈다기보단 일단 쳐낸 것들이다. 더 잘할 수 있었던 것들도 있지만 이미 지나간 일들이다.
지나간 것들은 보내주고 다가오는 것들은 또 잘 해내면 되지 뭐.
화이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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